의약품은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존재지만, 사용 후 남겨지는 폐의약품은 또 다른 환경 위협 요소가 된다. 감기약 한 알, 유통기한 지난 연고 하나도 방치되거나 잘못 버려지면 하수나 토양을 오염시키고, 수질 정화 시설에서도 걸러지지 않는 화학 성분이 생태계로 흘러 들어가 약물 내성균 발생과 수중 생물의 생식 장애까지 유발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공통적으로 부딪히고 있는 고민이다.
각국 정부와 지자체, 약사회, 시민단체 등은 폐의약품을 안전하게 수거하고 처리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와 실천 방안을 마련하고 있으며, 그 접근 방식은 국가의 환경 철학과 보건 시스템, 시민의식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한국과 유사하게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일본, 환경 규제가 매우 엄격한 독일, 그리고 시민 캠페인을 통한 실천 유도가 강한 미국은 폐의약품 수거 정책 면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사례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일본, 독일, 미국의 폐의약품 수거 및 처리 체계를 비교하며, 각국이 어떻게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실질적인 제도를 정착시켰는지를 살펴본다. 동시에 한국의 현행 제도와 비교했을 때 우리가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이고, 당장 도입할 수 있는 실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도 함께 모색해 본다.
일본 – 약국 중심의 자율 수거 체계와 소비자 책임 강조
일본의 폐의약품 처리 체계는 약국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약국을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약에 대한 정보와 책임이 함께하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이 사용하지 않은 약이나 유통기한이 지난 약을 약국에 가져오면 상담을 통해 수거 여부를 판단하거나, 필요시 보건소 등 공공기관으로 안내하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일본은 폐의약품 수거를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수거 활동은 약국이나 지역 약사회의 자발적 참여에 기반하고 있으며, 약국은 고객 서비스의 일환으로 약을 수거하거나 폐기 안내를 제공하는 형태다. 일부 대형 약국 체인은 자체적으로 폐의약품 수거함을 운영하고, 사용된 약 포장이나 약봉투를 분리수거함 형태로 받아 재활용하는 서비스도 제공한다. 일본의 이 같은 시스템은 시민에게 '약은 책임 있게 사용하고, 남았을 경우 스스로 처리 방법을 확인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실제로 많은 시민이 약을 구매한 약국에 다시 가져가 상담 후 폐기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다만 일본 내에서도 지역 간 편차가 존재하고, 약국에 따라 수거 기준이 상이하기 때문에, 중앙정부 차원의 통일된 정책이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다. 정보 접근성이 낮은 고령층의 경우 여전히 약을 일반쓰레기나 변기에 버리는 경우도 있으며, 이러한 점은 앞으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다.
독일 – 법제도와 시민 교육이 결합된 유럽형 모범 시스템
독일은 환경 보호에 대한 의식이 높은 나라답게, 폐의약품 처리에 있어서도 매우 체계적인 법제도와 실행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독일의 폐의약품 수거는 지방정부 단위로 관리되며, 연방정부 차원에서도 폐기물 관련 법률을 통해 의약품 폐기 절차를 명시하고 있다. 일반 시민은 남은 약을 가까운 약국, 시청, 공공기관 또는 마트에 설치된 수거함에 가져다 놓을 수 있고, 약국은 의무적으로 이 수거에 협조해야 한다. 특히 독일은 ‘생산자책임제도(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를 통해 제약회사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수거 후 고온소각 처리까지의 전 과정을 정부와 민간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독일 시민은 약을 단순히 쓰레기로 생각하지 않고 ‘처리 절차가 필요한 화학물질’로 인식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 쓰레기와 약을 철저히 분리한다. 또한 독일 학교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환경 교육과 폐기물 분리수거에 대한 실습 교육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폐의약품에 대한 시민의식이 매우 높다. 일부 지역에서는 ‘약 봉투 회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사용 후 남은 약을 원래 약봉투에 넣어 지정 약국에 반납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독일은 폐의약품 수거에 있어 국가와 지자체, 약국, 시민이 각각의 역할을 명확히 이해하고 협조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한국이 중장기적으로 참고할 수 있는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미국 – 캠페인 중심 분산형 접근, 지역 자율성이 강한 유연한 구조
미국은 연방국가의 특성상 폐의약품 수거 체계가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주(state)마다 조금씩 다른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은 ‘시민 캠페인을 통한 자발적 참여 유도’에 강점을 가진 국가다. 가장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DEA(미국 마약단속국)가 주관하는 ‘National Prescription Drug Take Back Day’로, 연 2회 실시되는 이 캠페인은 전국 약국, 경찰서, 지역 보건소 등에서 동시에 폐의약품을 수거하는 대규모 행사다. 이때는 누구나 특별한 절차 없이 약을 반납할 수 있으며, 참여율도 매우 높은 편이다. 평상시에도 CVS, 월그린(Walgreens) 같은 대형 약국 체인에서는 상시 수거함을 운영하고 있어, 시민들이 약을 비교적 손쉽게 폐기할 수 있다. 다만 미국은 여전히 많은 시민이 약을 일반쓰레기로 버리거나 변기에 흘려보내는 습관을 갖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FDA는 ‘Flush List’를 통해 변기에 흘려도 되는 약과 안 되는 약을 구분하여 안내하는 독특한 정책을 운용하고 있다. 일부 지역은 가정용 약 중화 키트(예: Deterra Bag)를 무상 배포하여, 시민이 집에서 직접 약을 안전하게 폐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미국의 강점은 캠페인과 교육 콘텐츠, 시민 참여 유도 시스템이 매우 발달해 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지역 간 정보 격차가 크고 제도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의 자발성과 약국의 상업적 서비스 마인드가 결합된 구조는 한국의 민간 참여 모델에 시사점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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