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우리는 약을 쉽게 구하고 또 쉽게 복용하지만, 다 쓰지 않고 남은 의약품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명확한 기준 없이 행동한다. 특히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폐의약품은 생활 폐기물로 분류되지 않기 때문에, 일반 쓰레기나 하수구에 버리는 것은 환경오염의 원인이 된다. 약에 포함된 항생제, 호르몬, 진통제 성분은 하수처리장에서도 완전히 걸러지지 않아 결국 강과 바다로 유입되고, 이는 생태계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폐의약품을 안전하게 폐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그 원인 중 하나는 수거함이 너무 적거나,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폐의약품 수거함을 전국의 약국과 보건소 등에 배치하고 있지만, 시민들이 실질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수거 인프라를 구축했다고 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수도권과 일부 대도시에 비해 농촌, 산간, 도서 지역의 경우 폐의약품 수거함 설치 수가 현저히 부족하다. 이 글에서는 전국 폐의약품 수거함 데이터를 기반으로 현재의 수거 인프라 현황을 분석하고, 어떤 지역이 특히 취약한지, 그 배경에는 어떤 문제가 숨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짚어본다.
수거함 수는 늘고 있지만 지역별 격차는 여전히 심각하다
공공데이터를 기반으로 전국 폐의약품 수거함 설치 현황을 살펴보면, 수치상으로는 약 2만여 개 이상의 수거함이 설치된 것으로 집계된다. 하지만 단순히 수치만으로 이 문제를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설치된 수거함의 위치는 약국, 보건소, 일부 의료기관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설이 밀집된 지역은 수도권과 대도시에 한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폐의약품을 안전하게 버릴 수 있는 인프라는 특정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구나 마포구는 약국이 많고 인구밀도도 높기 때문에 1km 내에 수거함이 여러 개 분포되어 있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강원도 정선군, 전라북도 진안군, 경상북도 영양군과 같은 농촌 지역은 하나의 시군에 5개 이하의 수거함만이 존재하며, 어떤 읍면 지역은 아예 수거함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시민은 약을 버리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몇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접근성이 떨어지면 자연히 참여율도 떨어지고, 결국 대부분의 폐의약품은 일반쓰레기로 유입된다.
이러한 격차는 단순히 인구 수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유사한 인구 규모를 가진 지역 간에도 수거함 설치율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각 지자체의 정책 의지, 약국과 보건소 간의 협력 여부, 수거함 설치 예산 확보 상황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결국 특정 지역은 체계적인 수거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는, '사각지대'로 남게 되고 있다.
데이터로 본 부족 지역: 인구당 수거함 밀도에서 드러나는 문제점
전국 단위에서 수거함 설치 현황을 분석할 때 중요한 지표 중 하나는 ‘인구 1만 명당 수거함 수’이다. 이 지표를 기준으로 분석했을 때, 수도권 일부 지역은 6개 이상의 수거함이 존재하지만, 비수도권 농어촌 지역은 그 수치가 2개 이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령 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 수거함 부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폐의약품 사용량이 많은 계층일수록 오히려 폐기 수단에 대한 접근성이 낮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데이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강원도 태백시는 인구 약 4만 명에 수거함 수가 4개에 불과하며, 경북 봉화군은 3만 명 인구를 보유한 가운데 수거함은 단 2곳뿐이다. 전북 무주군은 수거함이 설치된 약국이 단 한 곳이고, 그 외 읍면 지역에서는 폐의약품을 수거할 수 있는 보건지소가 실제로 수거를 거부하는 사례도 보고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에도 제주시와 서귀포시 간의 격차가 심각하며, 특히 관광객이 많은 서귀포시는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폐의약품을 처리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가 대부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지 않거나,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지자체 웹사이트나 보건소 홈페이지를 통해 수거함 위치를 안내하는 경우가 드물고, 심지어 안내된 위치가 실제와 다른 경우도 존재한다. 이로 인해 시민은 폐의약품을 어디에, 어떻게 버려야 할지 몰라 결국 쓰레기통에 버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는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실패로 볼 수 있다.
정보 불균형이 만든 수거의 사각지대, 해결책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문제는 단순히 수거함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수거함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숫자만 늘려봤자 시민의 참여는 유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통합된 정보 시스템이다. 마스크 대란 당시 만들어졌던 '마스크 알리미'와 같은 위치 기반 시스템이 폐의약품 수거함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시민이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수거함을 손쉽게 찾고, 운영 시간과 사용 가능 여부까지 확인할 수 있는 앱이나 웹서비스가 필요하다.
또한 법적인 강제성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현재는 약국 자율적으로 수거함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으나, 이 방식으로는 전국적으로 균형 있는 설치가 어렵다. 일정 규모 이상의 약국과 의료기관은 의무적으로 수거함을 설치하도록 하는 법률 개정이 필요하며, 보건소나 보건지소도 단순한 협조 차원을 넘어 법적인 의무를 지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폐의약품을 올바르게 버리는 것이 환경 보호는 물론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지역 단위의 캠페인과 교육, 안내 활동이 병행되어야 한다. 수거함이 아무리 많아도, 시민이 그것을 사용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정책적, 기술적, 교육적 접근이 함께 어우러질 때 비로소 전국적인 수거 시스템이 작동하게 될 것이다.
전국의 폐의약품 수거함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지역 간 격차는 심각하다. 특히 농촌과 고령화 지역, 관광지 등은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으며, 이는 환경오염과 공중보건 측면에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단순한 수거함 설치 수보다 중요한 것은 ‘접근성과 정보 제공’이다. 누구나 쉽게 찾고, 안전하게 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당신이 오늘 한 알의 약을 어떻게 버릴지에 따라, 우리의 미래 환경은 달라질 수 있다.
'폐의약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동 약 리필 서비스’가 불러온 폐의약품 누적 문제 (0) | 2025.07.26 |
---|---|
온라인 약 구매 증가와 폐의약품 증가의 상관관계 – 비대면 진료 시대의 그림자 (0) | 2025.07.25 |
전국 약국 폐의약품 수거율 TOP 10 지역은 어디일까? (0) | 2025.07.23 |
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폐의약품 넣는 지역, 아직도 존재한다 (0) | 2025.07.22 |
약국 없는 군 단위 지역, 폐의약품 수거는 누구 몫일까? (0) | 2025.07.21 |